“아! 그런가요? 부인!”이공자는 자신도 모르게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목숨을 주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제 아내를 내주어야 한다니 이는 인륜도덕(人倫道德)을 따져보더라도 도무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과연 그럴지는 몰라도 아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아내를 내어주어야 한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던 것이었다.“서방님!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숨을 줄 수 있는 친구 사이라고 하면서도 아내를 하룻밤 단 한 번 허락하지도 못한다면 그것도 친구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한다면 어찌 우정어린 친구
“어흠! 내 그런 말을 내 입으로 꼭 해야 할련지 원!……”“서방님! 말을 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이고, 말을 하고도 후회를 할 것이라면, 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혹시 안공자님의 병에 특별한 묘책(妙策)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김씨 부인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이공자를 압박하며 고삐를 조여 왔다. 이공자는 더는 머뭇거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공자로서는 병의 원인을 알고도 새파란 나이의 친구가 죽어가는 꼴을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수수방관(袖手傍觀)한다면 도무지 우정을 나누는 친구의 도리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아니
“그 글쎄…… 참! 그 병이……”이공자는 김씨 부인의 눈빛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서방님, 왜 그 병을 말씀하기가 어려우신가요?”김씨 부인이 의문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아! 아!…… 아! 아니오!”이공자는 머뭇거렸다. 상사병이라고 어찌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내인 당신을 오매불망(寤寐不忘) 사모(思慕)하여 그리 깊은 병이 들어 오늘내일 생사(生死)를 오락가락하는 것이라고 어찌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공자는 속으로 끙! 앓으며 냉가슴을 쳤다.“서방님, 서로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각별한 죽마고우(竹馬故友
“허허! 부인, 부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이공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서방님, 세상사는 이렇게 차례도 순서도 없이 형형색색(形形色色) 무질서(無秩序)하게 어우러져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지요. 사람의 생사(生死)도 그렇지 않겠어요?”김씨 부인이 말했다.“어음! 부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새파란 젊은 친구가 앓아누워 있으니 마음이 몹시 아프군요.”이공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서방님도 잘 아시겠지만, 공자께서 ‘싹은 텄는데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 있구나!(묘이부수자(苗而不秀者) 유의부(有矣夫), 꽃은 피었으되 열
“허참! 부인, 친구의 생사존망(生死存亡) 때문에 상심하고 있는데, 그 무슨 엉뚱한 질문이신가요?”이공자가 김씨 부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서방님, 그리 말씀하지 마시고 한번 대답을 해보시지요?”김씨 부인이 다그쳤다.“허허! 그래요? 봄이라 하면 저 연둣빛 새싹을 달고 피어나는 진달래가 있으니 봄은 분홍색이 아니겠소?”이공자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그렇군요. 서방님, 그렇다면 여름은 무슨 색깔일까요?”김씨 부인이 말했다.“으음! 여름에는 꽃보다도 불꽃 같은 태양 아래 실록이 우거져 푸르니 녹색(綠色)이라 할 수 있겠
“으음……목을 베어줄 수 있는 사귐이라! 그래 우리 사이가 서로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사이였던가! 그래……친구 고맙네!……”안공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공자를 바라보고 말했다.“그렇지! 이 사람아!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가 아니었던가! 내 모든 걸 다 들어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게나? 자네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내에게 말못할 사연도 진실한 친구 사이에는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서 말씀해 보시게!”이공자는 안공자에게 가슴 속에 감춘 말을 시원하게 토해내 보라고 거듭 차분하게 타이르듯 말
“어허! 이 사람아! 이 무슨 날 벼락인가? 황소도 때려잡을 만큼 건강한 친구가 병석에 누워있다니 이 무슨 일인가? 어서 벌떡 일어나야 하지 않은가?”이공자는 죽음이 목전(目前)에 이른 듯 숨만 달싹이는 안공자를 보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으으음!……”안공자는 이공자를 바라보며 대답 대신 가늘게 신음을 토해냈다.“보아하니 천하의 내로라는 의원도 고치지 못할 병이라면 분명코 마음의 병일 터! 혹여 친구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거들랑 주저하지 말고 내게 다 털어놓으시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 하겠나? 이 몸이 부서
그날 이후로 안공자는 자나 깨나 이공자의 아내인 김규수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려 밥을 먹어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하였고, 책을 읽어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름답고 청순한 아내가 밥을 지어 와도 짜증을 내며 물려버렸고 가까이 오기라도 하면 무슨 더러운 추물(醜物)이 접근하는 양 싶어 몸을 도사리는 것이었다.여러 날 입맛이 없어 밥도 입에 대지 않고 이래도 저래도 무조건 신경질을 부리기만 하자 안공자의 몸은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눈두덩이가 휑하니 꺼지고 가슴에 뼈가 잡힐 듯 말라만 가는 것이었다. 안공자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공자가
이사또가 말을 하면서 그 서류뭉치를 빨간 불꽃이 넘실거리는 그 가운데로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하하하하! 이사또! 조상들이 해결하지 못한 해묵은 감정을 우리가 시원하게 해결하였습니다! 이제 서로 화평(和平)하게 삽시다!”김사또가 웃으면서 말했다.“아! 그래야지요! 김사또의 사심(私心) 없는 마음에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사소한 묵은 감정을 털고 후손들이 화합(和合)하며 살 수 있도록 평화(平和)로운 미래(未來)를 열어주어야지요! 하하하하하!”이사또가 화답(和答)하며 말했다.이사또와 김사또는 활활 타오르는 낡은 서류뭉치들을 바라보면서
그날 그렇게 병부의 일을 깨끗하게 해결하고 덕담(德談)을 나누고 김사또는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김사또는 술과 안주를 가득 장만해 들고 와서 다시 이사또를 찾았다. 병부 일로 인하여 이사또에게 미안한 감정을 깊이 가졌던 김사또가 그것을 사과하려고 예(禮)를 갖추어 온 것이었다.“내 이사또께 크나큰 잘못을 저질러 이렇게 주육(酒肉)을 장만하여 정식으로 사죄를 드리려고 왔소이다!”제천 김사또가 정중하게 말했다.“아이구! 김사또께서 지난번에 해주신 말씀으로도 족한데 이리 오시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이사또가 말하며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이사또와 김사또는 단둘이 앉아 술을 들었다. 이사또는 병부를 찾은 즐거운 기분으로, 김사또는 병부를 돌려준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는 마음을 풀고 기분 좋게 한잔 들이켰던 것이었다.“허허! 김사또! 집에 돌아와 두루마기를 헤쳐보니 병부가 없어져서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였소이다!”이사또가 말했다.“아무렴! 이사또! 그러셨겠지요! 골탕 한번 먹여야겠다는 짓궂은 생각에 그만 너무 심한 마음 고생을 시켰소이다!”김사또가 말했다.“그러게요!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았소이다! 하하하하!”이사또가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사실은 저도 병부를 찾으러
아마도 이는 이사또가 불난 것을 핑계 대어 두루마기를 김사또 자신의 무릎에 벗어 던지고 간 것이 아니겠는가? 이사또는 지난 김사또의 생일잔치에 술에 취해 방에 누워 잠들어 버렸을 때 분명 김사또가 병부를 떼어갔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오늘 이와 같은 기회를 준 것이 확연(確然)하지 않은가? 지금 병부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크게 경을 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김사또는 재빨리 병부를 이사또의 두루마기에 달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불을 끄고 돌아온 이사또는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친절하게 김사또의 술잔에 술
술김에 남의 소중한 목숨줄과 같은 병부를 훔쳐냈는데 도무지 돌려줄 방도도 찾지 못하고 또 찾으러 오지도 않으니 김사또는 가슴을 펄펄 끓고 있었다. 도둑맞은 이사또나 도둑질을 한 김사또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병부를 찾는다는 소식도 없는데 뜻밖의 초대장이 날아왔으니 더욱 큰 불안이 엄습했다. 혹여 김사또 자신이 병부를 도둑질한 것을 이사또가 알고 은밀히 조정의 관리들과 내통하여 자신을 붙잡으러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지금이라도 지난 일을 솔직하게 이실직고(以實直告)하며 잘못을 빌고 병부를 돌려주면 어
이사또는 자꾸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불안(不安)한 발길을 놓았다. 이사또는 생일잔치 술상이 늘어선 관아 대청으로 올라서며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들께서 불이 나서 걱정이 많았겠습니다! 이제 불을 다 진압(鎭壓)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시기 바랍니다!”“아이구! 다행입니다!”손님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사또! 뜻밖의 화재로 많이 놀랐겠습니다. 어서 앉아 술 한잔 받으세요!”제천 김사또가 이사또에게 말했다.“아이구! 덕분에 불을 다 껐습니다! 일하는 계집종이 전을 짓다가 그만 나무에 옮겨붙
“하하하! 김사또께서 오셨군요. 원로(遠路)에 감사합니다. 어서 대청으로 오르시지요!”이사또가 반갑게 소리치며 김사또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사또 감축(感祝)드립니다!”김사또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말했다.이사또는 제천 김사또를 며느리가 시켰던 대로 반갑게 맞이하며 주안상이 차려진 대청으로 올라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자! 멀리서 오신 우리 김사또 한잔 받으시지요!”이사또는 김사또에게 술을 권했다.“하하하! 감사합니다!”김사또는 권하는 술을 받아 달게 마셨다.이렇게 김사또는 이사또가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마시며 잔치
‘허허! 이러다가 정말 목숨을 부지할 수 없지 않을까?’이사또는 깊이 한숨을 내 쉬었다. 병부를 잃어버린 일이 너무나도 큰 일이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기도 하였지만 어린 며느리를 믿고 무조건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 왠지 믿음이 생기지 않기도 하는 것이었다.이사또는 저녁 밥상을 들고온 며느리에게 넌지시 말을 내보았다.“아가!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병부를 되찾으려 하는 것이냐?”“아버님, 아직은 그 방도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자칫 말이 새어나갔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이 수포(水泡)가 되어
“아버님,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진지를 드시고 기운을 차리십시오!”“아하! 그래! 그렇다면 병부를 되찾을 방법이 있다는 말이로구나?”그 말을 들은 이사또의 표정이 대번 환해지며 소리쳤다.“그렇고 말고요. 그깟 일로 아버님께서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시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자칫 건강이라도 상하시게 되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김씨 며느리가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시아버지 이사또에게 안심을 주는 것이었다.“허허흠! 그래!……그 그렇다면 그 방도가 무엇이더냐?”이사
“어! 어흠!……”이사또는 헛기침을 하고는 한동안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몸이 건강해야 하지만은 정신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몸이 아무리 튼튼하고 건강하다 해도 그 몸을 조종하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면 힘센 소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정신이 아무리 바르고 지혜롭다 하더라도 몸이 병들어 쇠약하면 그 또한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견주어서 별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몸이나 정신이 참외밭에 참외처럼 서로 비슷비슷한 것이었기에 평소에는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 청천벽력(靑天霹靂)이라도 맞은 듯 이사또는 안절부절 넋이 완전히 나간 사람처럼 마구 허둥지둥 대는 것이었다. 왕이 신하 된 지방관에게 병마지권(兵馬之權)을 행사하는 병부(兵符)를 신표로 주었는데 그것을 잃어 먹었더니 그것은 모든 것이 끝장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제천 김사또의 집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을 때 과연 누가 이사또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병부를 몰래 가져가 버렸단 말인가? 조상 대대로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사이로 서로 왕래도 없이 살아온 처지였는데 이것을 기화로 ‘어
어느 결 술에 만취(漫醉)한 이사또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놓아버리고 그 자리에 눕고 말았다. 제천사또가 주는 술이며 친구들과 명사들이 준 술을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받아마신 결과였다. 이사또는 체면도 모조리 잊어버린 채 잔치 상머리에 꼬꾸라져서 그만 깊이 잠이 들고 말았다. 술에 장사 없다더니 이사또가 그 꼴이 난 것이었다.술에 취해 달게 잠을 자고 일어나니 그 사랑방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직 이사또만 혼자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어어! 이거 무슨 낭패(狼狽)란 말인가! 남의 생일잔치에 와서 술에 취해 혼자 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