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사(天下事)가 모두 화통(和通)하여 모두가 다 일가(一家)를 이뤄 살수만 있다면 무엇이 그리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족속(族屬)들이나 그런 원인을 제거하면 천하는 화평(和平)할 것이 아니오이까?”이진사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허허! 그러신가요? 그럼 사또께서 나의 곤란한 고민 덩어리를 송두리째 그대로 가져가시겠다 그 말씀인가요?”김진사가 이사또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세상을 살면서 고민이 없을 수가 있소이까! 모든 것을 제가 감당하겠소이다!”이사또가 말했다.“하하하하하! 오늘에야 이 마음이 맑아졌으
세속에 묻혀 사람들이야 권력과 돈을 가진 자가 사돈 맺자고 하면 ‘얼씨구나! 지화자!’ 하고 나서서 당장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겠으나 세상의 달고 쓴 이치를 잘 아는 김진사 입장에서는, 더더구나 카랑카랑한 칼날 같은 선비 유생의 정신을 닦은 ‘4부철학(四不哲學)’을 주창한 선친을 두었으니 어찌 함부로 처신할 수가 있단 말인가!“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인욕(人慾)을 멀리하고 자연(自然)과 우주(宇宙)와 순일무잡(純一無雜)으로 어울려 한세상 살다 갈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사란 것이 흙탕물이라 산중에 들어가 도를
이사또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김진사께서는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따님을 두셨습니다. 이번 사건을 따님의 지혜로 해결하게 되었는데, 소관이 느낀 바가 심히 큽니다.”이사또는 김규수를 칭찬하며 뜸을 들였다. 그 말을 들은 김진사가 술잔을 들고 한잔을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기울이더니 입맛을 ‘쩝!’하고 다시고는 입을 열었다.“사또께서 그리 칭찬을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그래서 김진사께 드리는 말씀이온데 저의 아들자식이 하나 있는데 올해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진사님의 따님과 서로 혼례를 올려주면 어떨
“허허! 사또께서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일을 잘 처리하여 주어서 천만다행(千萬多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어서 오시지요!”김진사가 이사또를 맞이했다.“좋습니다! 마련해온 주육(酒肉)이 있으니 한 잔 드시지요!”이사또가 말에서 내리더니 데리고 온 종자(從者)더러 주육을 풀어 사랑방에 술상을 차리게 했다.“사또께서 이리 방문하셨는데 우리 집에서 주안상을 보아 올려야 하는 데 준비를 다 하여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사또!”김진사가 웃으면서 말했다.“지체 높은 김진사 댁에 오면서 어찌 빈손으로 올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바쁘신 중일 텐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진사 댁의 김규수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외모도 아름다운 데다가 출중한 지혜까지 겸비하였으니 최고의 규수임에 틀림이 없었다. 더구나 훌륭한 가문에 격조 높은 선비의 마음을 지녔으니 더없이 좋았다.모름지기 한 집안이 융성(隆盛)하려면 그 집안에 들여올 며느리가 좋아야 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자갈밭이나 모래 구렁에 떨어지면 만사 허사였다. 비록 씨앗이 좋지 못한다고 하여도 좋은 밭에 떨어지면 훌륭하게 자라나는 것이었다.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이사또는 어느 날 좋은 술과 고기와 과일을
그리하여 허공달은 최부자 집안의 막다른 비극을 예감하고는 말없이 숨어버린 것일까? 최부자는 허공달이 집을 떠나기 며칠 전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높이 솟은 산은 깎여져서 평야가 되고, 깊은 강은 메꿔져서 또 평야가 되는 법이지요. 방법은 반대지만 이르는 목적은 같지요. 그것을 순환시키는 것은 물이지요! 가진 것은 없어지고 텅 빈 것은 다시 채워지고! 그렇다면 물은 무엇인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급속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하심(下心),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 무한대(無限大)의 동력(動力)! 반드시 주린 곳을
처녀가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고 앉은 자리에서 길을 막고 도무지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어찌하여 다 망해 죽어가는 나를 따르려 하는가! 그 마음 잘 알았으니 처녀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잘 모시고 아름다운 꿈을 펼치며 사시게나! 그것이 내 마음일세!”최부자가 그렇게 말을 하며 처녀를 피해 앞서 걸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무엇을 더 바라 저 생떼 같은 처녀의 앞날까지 막는단 말인가! 최부자는 처녀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최부자 뒤를 따라 정씨 부인과 꼽추 아들이 그 처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포졸도 죄인들을 재
그 말을 들은 최부자는 순간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글썽이는 것이었다.“허허! 그렇던가!……”그렇게 말을 하며 최부자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가슴 속 뜨거운 것을 억누르며 눈가를 번쩍 손으로 훔치는 것이었다. 뜨겁게 솟아오르는 눈물방울이 눈가에 맺혔기 때문이었다.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도 그 처녀의 말을 듣고는 말문을 닫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허공달! 참으로 허공의 말이 맞았도다! 만석 부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나에게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공덕(功德)을 쌓게 하여 만석꾼 부자로 만들어 주더니,
“최부자 어르신 절 받으십시오!”욱신거리는 몸으로 절뚝거리며 겨우 발걸음을 떼는 최부자는 뜻밖의 상황에 정신이 어리둥절하였다. 도대체 이게 무어란 말인가? 다 망해서 범죄인이 되어 멀리 제주도 섬으로 유배 가는 마당에 그런 참담하게 패망한 자를 찾아와서 길 위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 소녀가 있다니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최부자는 생각했다.“어어! 도대체 이 무슨 일인가?”최부자는 그 처녀를 보고 신음 같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자세히 보니 열대여섯은 되어 보이는 아리따운 처녀였다. 비록 반가(班家)의 귀한 몸으로 자라난
“아이구! 저 파렴치한 사기꾼들이 붙잡혀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가는구만!”수염이 허연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죽일 놈들! 아무리 김진사댁 김규수가 탐이 난다고 흉계를 꾸며! 천벌 받을 놈들!”수염이 새까맣게 난 젊은 사람이 소리쳤다.“현명한 이사또 나리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저놈들을 잡을 수가 있었겠소!”머리에 갓을 쓴 선비인듯한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이사또 나리도 현명했지만 김진사 댁 김규수의 지혜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저놈들의 흉계를 잡아낼 수가 있었겠는가! 참으로 훌륭한 규수일세!”수염이 새하얀 나이가 든 선비가 말을 받
“으음! 참으로 기특하구나!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정선지심(正善之心)을 가졌으니 기녀(妓女)로 살아갈 여인이 아니었구나! 너의 소원이 있느냐? 숨기지 말고 말하라!”이사또가 숙향을 치하(致賀)하며 말했다.“예! 사또 나리! 소녀,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려 아들딸 낳고 여느 여인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옵니다!”숙향이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진솔하게 말했다.“그렇구나! 좋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니 너를 도와줄 것이다! 좋은 배필이 있다면 이다음에 중신을 서줄 것이다! 우선 오늘부터 관아
“소녀의 기방에 저 박옥주라는 자가 술을 마시러 왔는데 가산을 정리해 입산하여 수도승이 되겠다고 하면서 오천 냥을 어느 창고에 숨겨놓았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이번 생에는 수도승이 되는 것보다 저와 같이 한평생을 사는 것이 좋겠다면서 멀리 도망가서 신접살림을 나자고 했지요.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소녀가 말하자 창고에 숨겨놓은 그 오천 냥을 직접 확인해 주겠다면서 밤에 소녀를 데리고 그 창고에……”숙향이 박옥주와 있었던 지난 일을 소상히 이야기했다.“허허! 그 말이 사실이냐?”이사또가 확인해 말했다.“사또 나리! 어느 안전이라고
“으음! 지독한 놈!”이사또는 그날 박옥주를 하옥했다.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하며 목숨으로 그 진실을 엄폐(掩蔽)하려 하는 지독한 인종이 세상에는 더러 있는 것인데 바로 박옥주가 그러한 인간이었다. 도덕도 윤리도 진실도 전혀 통하지 않고 오로지 동물적인 욕망으로만 똘똘 뭉쳐 살아가는 인종들, 세상에는 사람의 거죽만 썼을 뿐 실상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종자들이 부지기수로 널려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양심(良心)이란 것은 없는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오직 폭력과 술수와
“여봐라! 저 박옥주가 만 냥과 오천 냥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보구나! 제정신이 들어 진실을 말할 때까지 매우 쳐라!”이사또가 눈을 매섭게 뜨고 박옥주를 노려보며 호령했다.순간 나졸이 하늘 높이 치켜들어 솟은 곤장이 박옥주의 엉덩이를 향해 ‘딱!’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끼처럼 내리꽂혔다.“아! 아으으으윽!”박옥주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듣는 사람들 모두 소름이 오싹 끼치게 하는 것이었다.“어서 말하라! 만 냥이냐? 오천 냥이냐?”이사또가 소리쳤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서 빚을 주는 사람도 아니고 뇌물
“허흠! 그래, 그렇구나! 어서 옥 안에 있는 최부자를 끌어내 오너라!”이사또가 사령에게 명령했다.잠시 후 최부자가 끌려 나와 동헌 앞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여봐라! 최부자는 저 박옥주에게 얼마의 뇌물을 어떤 용도로 주었는지 소상히 밝히도록 하라!”이사또가 최부자를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사실은 사또 나리! 저 박옥주가 이방 유재관을 통해 사또 나리께 돈을 바쳐야 송사(訟事)에 승소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만 냥을 요구하였습니다요. 그리하여 제가 모아 놓은 돈 일만 냥을 밤에 몰래 우마차에 실어 보냈습니다요!”최부자가
아무래도 이방 유재관과 박옥주 사이에 무슨 은밀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고 있던 이사또는 이방 유재관에게 자신이 속아 넘어간 척 그를 치하하며 박옥주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이간계(離間計)를 쓴 것이었다. 어리석은 자는 천하대세(天下大勢)의 중심을 절대로 파악하여 알지 못하고 작은 욕심에만 온 정신이 팔려 종국에는 세상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세상 사람들아! 말하노니 지금 권좌에 앉아 잘 나간다는 저 추저분한 인종들을 절대로 우러러보지 말고 굽신거리지도 말라! 처참하게 시궁창에 떨어져 곤두박질쳐 처참하게 져버릴 날이
‘허허! 그렇다면 이사또는 이방 유재관에게 뇌물(賂物) 오천 냥을 바친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이제 그 뇌물에 대하여 바른대로 말을 하라고 극심한 문초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종국에는 최부자를 불러내 와 뇌물을 준 사실을 확인할 것이고, 최부자는 그것을 순순히 실토할 것이고, 그리되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 아닌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너 죽고, 나 죽고 같이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박옥주는 순간 눈에서 불 번개가 번쩍 일었다.순간 박옥주의 귓전으로 이사또의 성난 목소리가 송곳처럼 파고들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말씀 올리겠습니까?”유재관이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좋다! 아전 일을 보아온 그대는 의당 그래야 하겠지! 여봐라! 이방을 풀어주고 이리로 올라오게 하라!”이사또가 갑자기 이방 유재관을 꽁꽁 옭아 묶은 오라를 풀어주게 하고는 동헌 마루 위로 올라오게 하는 것이었다. 사령과 포졸이 이방 유재관을 묶은 오라를 풀어주더니 이사또가 앉아있는 동헌 마루 위로 올라가게 했다.“이방은 내 옆에 서 있으라!”이사또가 이방 유재관에게 의자 옆에 서 있으라고 말했다.“예! 사또 나리!”유재관이 이사또 옆에 서면서 도대체 이
“좋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시 주리를 틀리라! 관아의 아전이 거짓을 고한다면 아니 될 것이야!”이사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방 유재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예! 사또 나리! 사 사사실은 박옥주는 관아의 밀정으로 일을 해온 간자(間者)로서 민심을 감시하고 화적떼나 역적무리 또는 범법자를 감시하면서 관아에 필요한 임무를 대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부자 아들의 혼인 문제로 송사를 하게 되면 사또 나리께 고해 잘 봐달라고 부탁을 해와 그것은 아니 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찾아와서 부탁을 하길래 그럼 추이를 봐서 도와주겠다
이방 유재관은 박옥주가 붙들려 오자 그와 밀담하여 결탁하고 돈을 받은 것이 발각될까 두려워 그 길로 줄행랑을 놓았다가 세끼 밥을 굶게 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밥을 구걸해 먹기도 힘든 일이었고 또 마땅히 잠을 청할 곳을 구하기도 몹시 힘든 것이 이놈 세상살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굶주린 짐승이 되어 무작정 외지를 떠돌다가 돈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 다시 달아나려는 참이었는데 덜컥 붙잡힌 것이었다.오라가 지워져 감옥에 갇힌 유재관은 다음 날 아침 관아 동헌에 높이 앉은 이사또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유재관은 동헌 앞마당에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