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또와 아버지 김진사의 눈빛이 김규수의 왼팔로 가서 꽂혔다. 김진사는 속이 바삭바삭 타들어 가는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딸을 넋 나간 듯한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냘프지만 깡마른 새하얀 손, 그러나 야무지게 주먹을 쥔 여인의 손, 그 손이 허공에서 여름 담장 위 박꽃처럼 파르르 떨렸다.김규수가 가느다랗고 긴 오른손 손가락을 놀려 자신의 왼팔의 저고리 소매를 천천히 걷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사또는 목 안이 바싹 마르고 숨이 막혔다. 이 순간 이사또 또한 극한 긴장감이 몰려온 것이었다. 절세
김진사 부녀가 있는 밀실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은 이사또는 김규수를 지엄(至嚴)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껏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여봐라! 방금 듣자 하니 최부자의 아들이 한 말이 너의 왼팔에 엽전만큼 크기의 검은 기미가 있다고 한 너의 말과 전혀 다르지 않으니 이는 어찌 된 까닭이냐? 일점추호(一點秋毫)의 거짓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명심하렷다!”“예! 사또님!”그렇게 대답을 한 김규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 무릎을 꿇고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소녀, 사또님께 청을 올리겠습니다. 이젠 이
“예이! 사또 나리! 명 받들겠습니다!”방 안에 있던 이방 유재관이 크게 대답을 하고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이사또는 휴정(休廷)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최부자의 꼽추 아들이 관아로 불려 왔다는 전갈이 득달같이 이사또에게 전달되었다.“사또 나리! 최부자의 아들을 관아로 즉시 대령(待令)했습니다!”이방 유재관이 소리쳐 말했다.“그래, 그렇다면 최부자 아들을 다른 밀실로 당장 들이거라!”이사또가 최부자의 꼽추 아들을 다른 밀실로 들게 하여 따로 만났다. 최부자의 꼽추 아들을 본 이사또는 내로라하는 양반 집 김규수가
김규수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울려 나왔다. 그런데 금반지와 은비녀가 왜 김규수 규방의 반짇고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가 무엇보다도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핵심관건(核心關鍵)이 될 것인데 왜 김규수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해버리는 것일까? 최부자 아들에게 절대로 김규수가 그것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여기서 수천 번 말해보았자 도무지 증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기에 김규수는 과감하게 그것을 받아들여 용인해 버린 것일까?딸의 말을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김진사는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김규수가 다
“여봐라! 관청 마당 안에 있는 저 백성들을 모조리 문밖으로 나가도록 하라!”이 사또가 관아의 사령을 보고 호령했다.“예! 사또나리!”방망이를 든 사령이 우렁차게 대답하더니 우글거리던 백성들을 문밖으로 내모는 목소리가 들렸다.“백성들은 어서 관청 문밖으로 나가시오!”그 소리에 썰물 빠져나가듯 백성들이 삽시에 문밖으로 밀려 나갔다. 그 백성들 안에는 박옥주도 와서 섞여 있었다. 물론 윤 과부와 신 과부도 그 안에 있었다. 윤 과부와 신 과부는 재판 소문을 듣고 함께 와있었는데 재판 결과도 궁금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돈 백 냥을 주지도
오동이가 조용히 말했다.“나는 장사를 함께 해서 벌어들일 돈은 생각하지 않고, 먼저 장사를 함께할 사람을 본 것이지요.”“허허! 장사라는 것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했더란 말인가?”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사람 나오고 돈 나왔지, 돈 나오고 사람 나왔느냐?’는 말이 있지요. 요는 돈보다도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나는 장사를 함께 할 삼용이를 우선 생각해 본 것이지요. 어릴 적에 삼용이 집에 놀러 갔는데 그의 어머니가 나를 보고는 밭에서 막 따온 참외를 먹으려고 하다가 감추는 것을 보았
총각이 마당 가운데서 똥 두엄을 내는 것을 본 처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홱 돌아서 가버렸다.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그 총각을 보고 소리쳤다.“도대체 자네, 장가들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처녀가 신랑 될 총각을 보러 온다는데 없는 옷이라도 깨끗하게 차려입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지저분하게 저깟 똥 두엄일랑은 왜 쑤셔대고 있는 것인가?”“아주머니, 달랑 아래 두 쪽 밖에 가진 것 없는 놈이 장가는 가서 무슨 수로 식구들 거느리고 먹고 살 수 있겠나요? 인물이 아무리 곱더라도 이렇게 열심히 두엄을 뒤집고 일하는 사내를 보고
어차피 그 일 때문에 사또를 만났다고는 하지만 사또가 바로 질문을 하고 들자 김진사는 말문이 큭! 막혔다. 딸 방의 반짇고리 안에 귀신도 모르게 들어있던 금반지와 은비녀의 까닭을 무슨 수로 증명해 보인단 말인가?“예! 사또님, 실로 괴이하고 참담한 일을 당해 참으로 소녀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또님께 말씀 올리기 전에 먼저 청이 있사옵니다. 지금 관청 마당에 몰려온 사람들을 다 물러나게 하시면 말씀 올리겠사옵니다.”김규수가 가득 몰려든 관청 마당의 사람들을 물러가도록 말했다. 이사또가 김규수를 보니 둥근 이마에 발그레한 얼굴빛이 고운
며칠 후 김진사 부녀는 단양으로 부임한 신관 사또 이긍호(李肯浩)의 호출장을 받았다. 호출장을 받은 김진사는 이것이 최부자가 낸 송사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김진사는 딸을 불렀다.“내일 아침에는 관아에 나가야겠구나. 기어이 최부자가 자기 아들과 너를 엮어 송사를 냈나 보구나.”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아버지 김진사를 김규수는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소녀, 최부자 집에서 없는 사실을 이리 엮어 이 집안을 곤경에 빠트리는 데다가 이로 인해 아버님께서 마음고생을 심히 하게 되시니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그래, 너의 마음이야 의당 그
“낭자! 그대의 꿈을 내 오늘 밤에 꼭 이뤄드리리다! 그대의 살결은 마치 저 은사(銀沙)와 같사이다!”“호! 그런가요? 서방님, 제가 살던 집 앞에는 어릴 적 강이 있었는데 그 강가에 가면 항상 하얀 은모래가 펼쳐져 있었지요. 그 은모래밭을 맨발로 걸어가면 발자국이 찍혔지요. 강물 소리 따라 멀리까지 걸어가서 뒤돌아보면 곱고 긴 발자국이 아스라이 보였지요. 서방님! 듣고 있나요?”숙향이 어둠 속에서 박옥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음야! 음야! 어응!........... 푸우우! 그르렁! 푸아아!”박옥주가 대답을 하다말고 잠에 취한
“이년의 마음이 지금 그렇단 말이어요! 서방님, 오천 냥을 가지고 아무도 몰래 이곳을 멀리 떠나 이년이랑 신접살림을 나자고 한 이년의 말이 거짓인 줄 알았었나요?”숙향이 울음을 뚝! 멈추고 말했다. 역시 총명한 여자는 사내의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것을 다시금 확인할 줄 아는 것일까?“그 그렇구나! 어찌 거짓을 말하였겠느냐?”박옥주가 말했다.“그런데 서방님은 이년을 마치 늙은 퇴기나 달콤한 살만 와삭 베어먹고 버릴 복숭아 다루듯 하면 되겠나요?”숙향이 아래에 누워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박옥주는 마치 은밀한 비밀이 발각되기라
숙향이 두 다리를 슬그머니 쩍 벌려 열고 몸을 밀어주고 덤비며 박옥주의 목을 달싹 끌어안고 몸을 비비고 들었다.“아아!”순간 숙향의 신음이 가느다랗게 터져 나왔다. 박옥주가 목을 달싹 끌어안고 덤비는 숙향의 입술을 와락 덮쳤다.“아흡! 으으음!........”숙향이 입술을 열어 박옥주의 뜨거운 혀를 받아주었다. 박옥주는 참지 못하고 발로 주안상을 구석으로 밀더니 숙향을 들어 그대로 방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벌떡 눕히고는 그 위로 사정없이 말처럼 올라타는 것이었다.“아! 아이구 서방님, 이년 죽네!”숙향이 순간의 기습에 아래에 잔
한동안 끌어안고 격렬한 춤사위의 대미를 장식하던 둘은 조용히 다시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숙향이 술병을 들고 박옥주의 빈 술잔을 채워 주었다.“서방님, 또 한잔 쭉 드셔야지요.”“어어흠! 그 그렇지! 너의 고운 춤사위를 보니 내 가슴이 뛰는구나! 봄날 나비 같고 가을날 서리맞아 물들어 떨어지는 색 고운 단풍잎 같으니 그 무슨 까닭이냐?”박옥주가 취기에 절은 소리로 한껏 들떠 말했다.“아이구! 서방님도 참! 다 아시면서 그러시는군요. 본시 여인이란 한창 꽃 피어나는 봄날 꽃밭에 너울거리는 나비 같기도 하고 또 서리 내리는 가을
그날 늦은 밤 박옥주는 다시 숙향이 기다리는 주막집 방으로 들어왔다. 여느 때 같았으면 숙향이 다른 손님을 받고 한창 노닥거리고 있을 터였는데, 조용히 혼자 방에 있었다. 정말로 박옥주의 말을 그대로 믿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서방님, 칫! 왜 이제 오시나요? 저를 잊고 가버리신 줄 알았잖아요오!”기다림에 지쳤다는 듯 숙향이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버선발로 달려와 맞으며 박옥주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앙증맞게 툭툭 쳤다.“허! 이 서방님이 너 숙향을 두고 가기는 어디를 가겠느냐? 오늘은 어제 못다 푼 회포를 단단히 풀어야 하지
불 끓는 욕망이 사그라져 버린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내에게 되돌아와 몰려오는 것은 늘 깊은 허무감이었는데, 불기가 싹 식어 사라져 버린 박옥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하룻밤 술값으로 선불(先拂)해 준 백 냥이 슬그머니 아깝게 여겨지고, 술에 취해 숙향과 멀리 달아나 신접살림을 내겠다고 약속했던 호언장담(豪言壯談)이 문득 되돌아 생각되고, 더구나 오천 냥 숨겨둔 비밀로 해야 할 자리까지 스스로 알려주고 말았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낭패가 없었다.지난번에도 술기운에 불시에 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또 무슨 귀신에 홀린 듯 주막집을
“에 에구! 빌어먹을! 이놈이 가끔 말을 들어 먹지를 않으니 쥑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말야! 어이구! 이거 참! 고흐얀놈!”‘참! 지랄 같은, 임시낭패(臨時狼狽)라!’ 박옥주가 웅크려 앉아 풀죽을 쑤어놓고 간들간들 시들어 죽어가는 제 그것을 붙들어 잡고 바라보며 볼멘소리를 했다.‘하!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정말로 불청객(不請客)인 화적떼 뭐라고 하는 시꺼먼 작자들이 재수 없이 들붙어와서 비수라도 날렸다 치면 그만 오천 냥은 고사하고 목숨줄이 붙어 있을 수도 없지 않았겠는가! 박옥주는 쩝! 하고 쓴 입맛을 다시며 풀린 아래 춤을
숙향의 검은 눈 창 가득 박옥주가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아래 춤을 붙잡고는 부르르 온몸을 떨며 새하얗게 눈을 까뒤집고 연방 ‘으아아아!……’ 계속 거칠게 숨 가쁜 신음을 토해내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들어와 박혔다.어허라! 박옥주가 왜 저러는 것일까? 꿈에도 그리던 숙향의 껍데기를 날 것으로 발랑 벗겨 손안에 거머쥐고 그 달콤한 꿀떡을 한입에 꼴깍 삼켜 버릴 절호의 기회에 왜 돌연 저렇게 자빠져 앉아 신음을 연거푸 토해내고 있는 것일까?아뿔싸! 다름이 아니라 또 그때 그날 밤 화적떼 운운하며 시퍼런 칼을 들고 들이닥쳐 목울대를
예로부터 사내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인과 관련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자연이 준 본성이 그러함 때문이었다. 조선 선조 때 선비들 다섯(정철, 심희수, 유성룡, 이정구, 이항복)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인가를 시로 표현해보기로 내기를 했다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제일 먼저 정철(鄭澈)이 청소낭월(淸宵朗月) 누두알운성(樓頭遏雲聲),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 했고, 심희수(沈喜壽)는 만산홍수(滿山紅樹) 풍전원수성(風前遠岫聲), ‘온산 가득 찬
박옥주는 속으로 신이 나서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고 속으로 외치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을 뒤틀면서 소리 없이 어두운 밤길을 뒤따라오는 숙향을 뒤돌아보며 맘껏 쾌재를 불렀다.들길 산길을 지나 이윽고 남의 집 허름한 창고 앞에 당도한 박옥주가 굳게 잠긴 자물통을 열었다. 소리 나지 않게 슬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박옥주가 뒤에 서 있는 숙향을 따라오라고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컴컴한 창고 안으로 숙향의 손을 잡고 들어간 박옥주가 돈 자루 앞에 앉더니 꽁꽁 묶인 자루를 풀어 손안 가득 잡히는 엽전 무더기 안으로 숙향의 손을
많은 재물이 있어야 편하게 살며 자식을 잘 길러낼 수 있을 것이기에 여자는 오직 재물 많은 사내를 본능적으로 우선 찾아 선택하는 것이고, 사내는 곱고 예쁘고 젊고 건강한 여자를 되도록 많이 거느려 우성종자(優性種子)를 번식하는 것이 본능적인 목적이므로 여자가 좋아하는 재물을 되도록 많이 가지는데 전 인생을 진력하는 것이었다.재물을 되도록 많이 갖는 방법이란 것이 소위 사내들이 세속의 지위와 권력을 갖는 것이었는데, 부정한 방법이든 합법적인 방법이든 간에 지위와 권력 그것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최선의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허어!